포경수술과 기독교

포경수술과 기독교

역사적으로 기독교 문명권이라고 하면 카톨릭 및 그리스 정교를  믿는 유럽을 가리켰고, 종교개혁과 신대륙 발견 후에는 유럽뿐만이 아니라 북남미 대륙, 호주 대륙 등을 포함하게 되었다. 현재 전통적 기독교 문명권에서 포경수술을 대대적으로 행하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포경수술은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의식인 것이며 미국의 포경수술도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포경수술은 그 원조인 미국에서조차 상대적으로 최근인 19세기 말에 시작된 풍습이었던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포경수술을 대대적으로 행하는 나라는 이슬람교국가와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우리 나라, 미국 필리핀 정도이며 현재 포경수술이 급격히 줄고 있는 미국을 제치고 우리 나라가 세계 제 1의 포경수술 대국이 되었음은 이미 언급한바 있다.

반면에 본 연구진은 심심치 않게 한국 기독교(개신교와 카톨릭 포함)인들로부터 포경수술(할례)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므로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어왔다. 이러한 이유만으로 포경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막연히 구약성서를 읽을 때 할례라는 말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포경수술과 기독교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의외로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어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성경의 할례는 포경수술을 하는 이유 중 주된 이유는 아닐지라도 일종의 “배경 이유”는 되는 것 같이 보인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인구의 1/4에 이르며 증가 추세에 있는 점을 감안하면 기독교와 할례의 역사적 관계를 짚고 넘어가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더욱이 기독교인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초기 기독교의 결정은 현재 유럽과 중 남미인들이 포경수술을 받지 않는다는 것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기독교가 세계에 널리 퍼질 수 있게 해준 중요한 결정이었다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교회의 장로들이었다(베드로, 바울 등…). 또한 초기 신자들 역시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방인들을 유대인과 구별하지 않고 기독교에 받아들이게 되면서 할례의 문제는 심각하게 대두된다. 즉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하여서는 할례가 필요하냐 아니냐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와 로마인들을 개종하기 위하여서는 할례를 권유할 수가 없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공공 장소에서 나체로 다니는 적이 많았던 그리스와 로마인들에게는 할례라는 것은 매우 기이하고 이방적인 풍속이었고 이 풍습에 대하여 많은 적대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부터 내려와서까지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사도행전 15:1). 바울과 바나바는 이로 인하여 일어난 분쟁 때문에 급기야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에까지 가서 사도들의 우두머리 격인 베드로와 예수의 동생 야고보의 의견을 묻기에 이른다. (바울의 제3차 예루살렘 방문) 이에 대하여 예루살렘에서는 바리새파에 속하는 일부 유대인 초기 기독교들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사도행전 15:5)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와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 율법과 할례 없이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다만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사도행전 15:20)라고 하면서 포경수술의 불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즉 이때 할례의 무용성과 율법 강요 금지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바울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할례의 무용성, 더 나아가 해악을 설교한다. 이방인들에게 행하는 할례를 실제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나니(갈라디아서 2: 3);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라디아서 5:2-4).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게 함뿐이라.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게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갈라디아서 6:12-15).

이와 같이 할례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던 바울도 디모데에게 만은 할례를 자신이 스스로 시켰다는 것이 흥미롭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사도행전 16:1-3). 여기서 보면 디모데는 유대인 사역을 위하여 할례를 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으로 치는 유대인의 관습과, 유대인에게 사역할 때는 아무래도 할례를 받은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더 재미있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자가 되지 말지어다 (고린도전서 7:18). 우선 이상한 점이 있다. 이방인이 할례를 받는 것은 물론 가능하다. 그렇지만 어떻게 할례자로 부름받은 자가 “무할례자”가 될 수 있을까? 이러한 구절은 구약의 외경 중 하나인 마카비서에도 나온다(Maccabees 1:14-15).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깊은 역사적, 언어적 조명이 필요하다.

우선 “무할례”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이는 영어로 “uncircumcision”이라는 말이며 우리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생소한 말이다. 사실 우리 나라의 성경에 나와 있는 “무할례”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틀린 번역이며 “반할례”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할지 모른다. 번역이 어찌되었든 우리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The Uncircumcised”라는 말이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그냥 유대인에게 이방인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것을 가리키는가?

“무할례(uncircumcision)”는 사실 포경수술을 받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처럼 보이고 행동하기 위하여 (때로는 생존을 위하여) 포피를 인위적으로 늘이는 운동 또는 수술을 의미한다 (J. P. Rubin: “Celsus’ decircumcision operation”, Urology 16, 121-124, 1980; T. Schneider: “Circumcision and Uncircumcision” South African Medical Journal 50, 556-558, 1976). 이미 로마의 셀서스(Celsus)는 2,000년 전인 AD 14-37년 경에 쓰여진 De Medicina에서 이러한 수술을 언급하고 있다: “포경수술을 받은 자가 다시 귀두를 포피로 덮고 싶다면 이를 위한 수술은 가능하다” (S. B. Brandes and J. W. McAninch, British Journal of Urology International 83, Suppl. 1, 109-113, 1999).

이러한 “반포경수술 혹은 반포경수술운동”은 로마 시대뿐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유대인들의 생존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독일 나찌가 유대인들을 포경수술의 여부로 가려내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하는 “비할례자가 되지 말지어다”라는  말은 바로 이 반포경수술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육체에 지나친 중점을 두는 것을 경계하였던 것이며 따라서 할례자에게는 무할례자가 되지 말 것이며 무할례자에게는 할례자가 되지 말 것을 권유한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반 포경수술은 이미 바울의 시대에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었음을 거꾸로 유추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반포경수술운동”인데 로마시대에는 Judeum Pondum이라는 무거운 구리 튜브를 성기에 부착함으로써 유대인들이 포피를 생성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아래그림 참조). 이러한 시도의 성공 여부는 매우 의심스럽다!

결론적으로 초기 기독교의 장로들은 포경수술의 문제에 대하여 매우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고 기독교인이 되는 데 있어서 포경수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명확하게 내렸다. 이방인들을 포경수술 시키려는 노력에 대하여서는 강력히 반대하였고 이러한 결정은 실제적인 면과 영적인 면에서 조명할 수 있다. 실제적인 면에서는 이방인들을 전도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으며, 영적인 면에서는 육체나 율법에 집착하지 말라는 교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또한 유럽, 러시아, 중남 아메리카 등의 대다수 기독교 문명권이 포경수술을 하지 않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며 만일 그 때 이방인에게 포경수술을 강요하였다면 기독교가 이처럼 세계 종교가 될 수 없었을 가능성도 크다. 따라서 현재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이 지니고 있는 막연한 구약성서-할례-기독교의 연관성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며 오히려 매우 비 성경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Uncircum

<그림 1: 주데움 폰디움: 로마 제국 시대에 무게로 음경피부를 당겨 포피복원을 하는데 이용된 깔데기 모양의 구리로 만든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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